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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

내가 기준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삶을 살다 보면 우리는 구멍에 나무를 끼우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을 많이 겪는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상가들의 대답은 각자 다를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전통을 알고 있는 현자에게 물어보거나 책을 보라고 할 것이다. 맹자는 선한 방향으로 간다는 전제 아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맹자가 말하는 마음의 선한 방향과 공자가 강조하는 전통은 결국 합치한다. 마음에 드러나는 것을 종이(죽간)에 옮겨 적으면 책이 된다. 따라서 공자의 책은 결국 맹자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공자와 맹자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옛날부터 찾아낸 집단 지성의 결과물을 적어놓은 책을 펼치라고 권하는 셈이다. 장자는 이들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책을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책을 보더라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방해만 될 뿐이라는 생각이다. 장자는 도대체 어떤 문맥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천도(天道)’를 보면 춘추시대 초기 패자로 이름을 날렸던 제()나라 ‘환공(桓公)’과 수레바퀴를 만드는 장인 ‘윤편(輪扁)’의 가상 대화가 나온다. 장자는 역사적 위인을 논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이야기의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우리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장자는 두 사람의 대화 형식을 빌려서 책이 왜 쓸모없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다.

 

환공이 마루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이 마루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을 리가 없지만 장자는 둘이 함께 있는 가상의 공간을 문학적으로 창조해냈다. 장자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묘하게 뒤섞어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으므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지는 말지어다.

윤편이 몽치와 끌을 내려놓고 환공에게 말했다.

“감히 묻자온데, 공이 읽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네요. (聖人之言也.)

윤편이 다시 물었다. “성인이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이미 죽었네요.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군요.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수레바퀴 기술자 따위가 어찌 왈가왈부하는가? 나를 설득한다면 무사히 살려두겠지만 설득하지 못하면 죽게 되리라.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평소에 늘 하는 일로 살펴보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헐렁거려서 꽉 맞물리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않고 덜 깎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 감각으로 터득해 마음에 흡족할 뿐이어서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바로 그 사이에 비결(기술)이 존재합니다. 저도 이를 제 자식에게 일깨워줄 수 없고, 제 자식도 저에게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나이가 70이 됐지만 늘그막에 아직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전해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께서 읽고 있는 것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왕조차 성인의 말씀을 존중하고 성인을 받들어 모신다. 그만큼 성인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 문구에서는 나라에 예속된 장인이 성인의 책이 지닌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곧 성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윤편이 성인을 모독한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우리는 “윤편이 쓸데없이 나섰다가 목숨을 잃지 않을까?”라고 걱정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장자는 윤편의 멋진 대답을 통해 반전을 마련했다. 윤편은 수레바퀴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이가 70이나 됐으면 자식에게 일을 물려줄 만하다. 웬만한 작업 공정을 매뉴얼로 만들어 놓고 실습을 하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넘겨줄 수 있다.

 

윤편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확하게 계량화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수레바퀴는 오늘날 자동차 바퀴처럼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다. 바퀴살이 빠지면 바퀴가 부서지고 바퀴가 부서지면 수레가 망가지고 수레가 망가지면 탑승한 사람마저 위험해진다. 이처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정밀 작업인지라 계량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늘날 자동차는 대량 생산되지만 수제 자동차는 훨씬 고가로 팔린다. 또 음식과 술의 경우 조리법대로 만들더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손맛의 차이가 난다. 그래서 단골집 주방장이 바뀌면 우리는 발길을 끊기도 한다.

 

장자는 한술 더 떠서 윤편의 수레바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인생살이를 말하고자 했다. 환공은 문제가 발생하면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윤편에 따르면 책의 대답은 환공의 개별적 상황에 대해 약간 헐거울 수도 있고 약간 빡빡할 수도 있다. 즉 책은 일반적인 언명으로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돼 있으므로 모든 상황에 들어맞을 수가 없다.

 

명절에 제사 지낼 때도 지방마다 음식을 진열하고 절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지침서에서 “이렇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안이나 권고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책은 ‘과거에 이렇게 했다’는 보고는 될 수 있지만 지금이나 미래에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장자는 윤편의 대답을 통해 책이 가진 한계를 말했다.

그는 사람에게 닥치는 상황과 사건은 모두 그 나름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라는 식으로 견적을 뽑고 결론을 내린다. 그 다음에는 새로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앞서 내린 견적과 결론에 따라서 판단을 한다.

 

장자는 이렇게 굳어진 마음을 ‘제물론’에서 ‘성심(成心)’이라고 불렀다. 한 번 마음이 굳어지면 여간해서 바꾸기 어렵다. 굳어진 마음에 어긋나면 잘못된 것이고 그것에 일치해야만 올바르게 된다. 성심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모든 것을 왜곡하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장자는 이를 알았기에 다음처럼 말했다.

“굳어진 마음을 따라서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가 스승이 없겠는가?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성심의 관행에 안주해 게으르게 행동하지 말고 성심을 넘어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즉 어떤 상황을 맞이해도 늘 ‘처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연애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된다는 걸 알지만 자꾸 그걸 귀찮아하고 익숙한 관행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장자는 윤편의 입을 빌려서 “책대로 해!” 또는 “늘 하던 대로 해!”라는 식으로 성심에 안주하는 사람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셈이다. 이념의 지배하는 틀에 갇힌 내가 되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본다. 창의성을 발휘한다. 내 자신의 기준의 출발점이 된다! 자발성, 주체성.... 조백=술찌꺼기 (2014.3.11 매경이코노미 신정근 성대 동양철학과 교수의 글을 읽고 느낀 소감)

 

 

 

Posted by 호롱불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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