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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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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아우구스티누스

[ Aurelius Augustinus ]

354.11.13~430.8.28

 

요약: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다.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주요 저서인《고백록》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354 11 13일에 그 당시 로마의 통치령이었던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키르텐시스(Numidia Cirtensis) 지방에 있는 타가스테(Tagaste, 오늘날의 알제리에 있는 수크 아라스(Souk Ahras))에서 태어났다. 타가스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 있던 아프리카 북쪽 해안의 항구도시인 히포(Hippo)에서 내륙으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그는 형제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었으나 370년 사망하기 전에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고, 어머니는 가톨릭에서 성녀로 추앙하는 모니카 성녀이다.

 

어린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 모니카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관습과 신자들의 경건함을 접할 수 있었다. 열여섯 살 무렵에 그는 잠깐 마다우라(Madaura)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경제적인 여건이 좋아진 371년부터 비로소 북아프리카의 대도시였던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학생일 때 이미 여자와 동거 생활을 했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동거녀와의 사이에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두었다. 이 동거녀는 밀라노 시절인 385년까지 그와 같이 살았다.

 

열아홉 살 때 그는 키케로의 영향으로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한 뒤 375년 무렵 문법과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타가스테로 돌아갔다. 그리고 타가스테의 부자인 로마니아누스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능력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한 카르타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사귄 친구들과 학생들이 『고백록』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이 시기의 끝 무렵에 그가 카르타고에서 만난 사람이 마니교의 파우스투스이다. 383년 그는 로마로 가서 새로운 아카데미아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384년에 시의 지사(知事)이자 황제의 대변인이며 원로원의 의장이었던 고위 관리인 심마쿠스(Symmachus)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과 트리어와 더불어 황제의 수도였던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그를 추천했다.

 

이 시기부터 안정된 지위와 권위 있는 직업을 갖게 되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신분에 어울리는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승낙한 소녀와 약혼했다. 이제 동거녀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했다. "그동안 내 죄는 더 쌓여만 갔습니다. 내 결혼에 방해가 된다고 동거녀를 떼어 버렸습니다.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던 내 마음도 찢어졌으며 상처 입었고 피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다른 남자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느님 당신에게 맹세하면서 그녀가 낳은 아들을 내게 남겨 놓은 채 아프리카로 되돌아갔습니다."(『고백록』 6, 15, 25)

 

그러나 약혼녀가 어렸으므로 2년 동안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동안 정부를 두었다. 하지만 결혼을 위한 시간이 오기 전에 종교가 그의 일부가 되었고, 그는 생의 나머지를 독신으로 살았다. 여전히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그는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고, 이때 플라톤의 저술들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386년 여름 휴가 이후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그의 아들과 알리피우스와 함께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386~387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전환점이 된 기간이다. 그는 키케로의 책에서 참된 행복은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원하는 데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덕을 구성하며 행복과 덕은 진리에 대한 탐구인 철학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391년에 히포에서 사제가 되었고, 395년에는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임자인 발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397년부터 히포 레기우스의 유일한 주교였다. 그는 히포가 반달족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던 430 8 28일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8세기 이후로 파비아(Pavia)에 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화체로 씌어 있는데, 핵심 내용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견해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그는 387년 부활절에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뒤 밀라노에서 작품을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이때 『음악론 De musica』『참된종교에대하여De vera religione』그리고『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집필했다. 그의 개종은 그 자신이 언급하는 바에 따르면 인상 깊은 철학서들을 읽은 경험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극적인 개종의 경험에서 유래한다. 이 둘 중 어떤 경우이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때까지의 인생 행로를 포기할 결심을 한다.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그리고 철학을 더 깊이 연구하려는 의도에서 그 당시 서른 두 살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몇몇 친구들 및 학생들과 함께 북이탈리아 지방인 카씨치아쿰에 있는 시골의 영지로 돌아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서 수도사 같은 삶을 살 생각이었으나 아프리카로 떠나기 직전인 387년 늦은 봄에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388년에야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그의 주요 저작들이 집필된 연대를 정리해보자. 그의 저작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리될 수 있다. 첫째, 386년과 388년 사이, 즉 그가 '전향' 직후에 집필한 작품들이 카씨치아쿰의 대화편들이다. 여기에는 386년에 완성한 『아카데미아 학파 논박』 『복된 삶에 대하여』 『질서론』과 386~387년에 집필한 『독백』, 387년에 집필한 『영혼불멸론』, 388년 로마에서 집필한 『영혼의 크기』 그리고 로마에서 388~389년에 집필한 『가톨릭 교회의 윤리』가 속한다. 둘째 부류에 속하는 저서들은 388~395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집필한 과도기 시대의 작품들이다.

 

우선 387~389년에 집필한 『음악론』, 388년 『자유의지론』 1, 391~395년에 집필한 이 책의 2권과 3, 388~389년의 작품인 『마니교도들에 반대하는 창세기 주해』, 389년의 작품 『교사론』, 388~396년의 작품인 『서로 다른 83개의 문제집』, 389~391년의 작품인 등이 그것이다. 셋째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은 그가 주교로 있을 때의 작품들로서 특히 그의 대표작들이다. 이 저서들은 그의 사상의 원숙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사상이 총체적으로 표현된 대작들이다. 396~398년에 완성된 『고백록』, 396~397년과 426~427년에 집필한 『그리스도교 교양』, 399~419년의 작품인 『삼위일체론』, 401~414년의 작품인 『창세기 축어 주해』, 413~426년의 『신국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426~427년에 집필한 『재론고』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2006.11.30, ㈜살림출판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 Saint François dAssise ]

1182~1226.10.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틴어: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1181년 또는 1182 ~ 1226 10 3)는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교회 수사이자 저명한 기독교 설교가이다.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이기도 하며, 프란치스코 사후 프란치스코회는 작은형제회와 카푸친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의 1회 수도회, 2회 클라라회, 3회 재속회로 나뉘었다.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프란치스코의 부친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매우 번영한 상인이었던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였다. 혈기왕성한 부유층 자제로 태어나 자란 그는 군인으로서 전투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204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가던 길에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간 프란치스코는 세속적 생활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로마로 순례를 떠난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보고 깊은 감동을 느껴 이후로 평생 가난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아시시로 돌아간 그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의 삶에 감동을 받아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프란치스코는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가를 받아 남자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여자 수도회인 클라라회와 제3회를 설립하였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이집트의 술탄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를 개종시키려고 하였다.  이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설립 당시보다 규모 면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를 보다 체계화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교황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은 후에 그는 점차 외부 문제를 멀리하였다. 1223년 프란치스코는 처음으로 베들레헴에서의 예수 탄생 사건을 재현한 성탄 구유를 만들었다.[3] 1224년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 당시 그리스도가 받았던 상처인 성흔을 받았다.[5] 1226 10 3일 시편 142(141)편을 읊으며 선종하였다.

1228 7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동물과 자연환경, 상인 뿐만 아니라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2013년에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도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

1936~

 

교황 프란치스코(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일찍이 품었던 종교적 소명에 따라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해 196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낸 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한 후 소집된 추기경단의 콘클라베에서 다섯 번의 투표 끝에 제266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시리아 출신 교황인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출신 교황이자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주 출신,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 된 것이다.

 

공식 교황명인 ‘프란치스코’는 이제까지 한 번도 교황명으로 사용되지 않은 이름으로, 청빈·겸손·소박의 대명사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 굳건한 의지가 이끄는 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트위터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이들과 교감하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서 사랑과 위로의 말을 전하는 ‘목자’로, 전 세계에 부드러운 혁명을 일으키는 ‘가톨릭의 어진 수장’으로 많은 이들의 벗이자 귀감이 되고 있다.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청빈, 겸손, 소박의 대명사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으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사용하였으며, 그의 굳건한 의지가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로 표출되면서 큰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