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 콩 전도사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 감동스토리
소년은 급사(給仕)였다. 황해도에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대중목욕탕 심부름꾼부터 모자가게 점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의 급사 자리를 얻게 됐다. 등사기를 밀어서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 교재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연스레 교재를 들여다봤죠. 용어가 어려워 옥편을 뒤져가면서 독학을 하다 보니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거든요.”
“아이 엄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아이를 업고 꼬박 하루 걸려 왔다고 했어요.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요. 차트를 보니 병명이 ‘소화불량’이었는데,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떴습니다.”
○ 1960년 4월: 불혹 넘어 유학길
1964
주변에선 “정소아과 원장이 미국에 다녀오더니 이상해졌다”고 수군댔다.
설사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들 사이에서는 ‘정소아과가 용하다’는 입소문이 났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아왔다.
결국 정재원은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 생산에 나섰다. 콩국이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명을 합쳐 ‘베지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당시 56세였던 그는 다시 한번 도전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가 사명감을 갖고 만든 베지밀은 지금도 두유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창업 후부터 올해(5월 말 기준)까지 만들어진 두유는 총 130억 개다. 이를 나란히 세우면 서울∼부산을 1630차례 오갈 수 있다.
‘인류 건강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고저’를 정식품의 창업이념으로 정한 그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기업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진정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2015년 6월: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 턱시도 입고 아내 장례식… 로맨티시스트 정 ▼
아내이자 동료였던 故김금엽 여사… 관속엔 결혼 징표 면사포 넣어줘
그는 서울 성모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시절 아내를 만났다. 고아였던 아내는 수녀원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 가톨릭 계열인 성모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중매가 여러 건 들어왔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박꽃처럼 예뻤던’ 아내 때문이었다.
그런 아내는 2004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정 명예회장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턱시도를 차려 입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그의 턱시도는 황해도 고향에서 올린 결혼식 때 입었던 예복이었다. 부부는 반세기 넘게 ‘결혼의 징표’인 턱시도와 면사포를 간직했다. 턱시도를 입은 정 명예회장은 아내의 관(
재계 최고령 창업주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
그러던 중 경북 영주시가 콩의 역사와 쓰임새 등을 집대성해 소개하는 ‘콩 세계과학관’을 짓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부금을 쾌척했다. 그 박물관이 올해 4월 30일 문을 열었다. 이것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생존해 있는 한국 재계의 창업주 중 최고령이다. 우리 나이로 99세인 그는 올 1월 ‘백수연(白壽宴)’을 치렀다. 백수연을 한자로 쓸 때는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흰 백(白)자’를 쓴다. 100세보다 한 살이 적은 99세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다. 》
가족들은 노령의 정 명예회장이 개관식에 참석하는 것을 말렸다. 서울에서 영주까지 차량으로 꼬박 4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개관식에 나타났다. 거동이 편치 않아 휠체어에 탔지만 허리는 꼿꼿하게 편 채로. 올 들어 두 번째 외출이었다.
4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에게 한 세기에 가까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반세기 가까이를 콩 연구에 매달린 정 명예회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감동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느낌을 준다. 이런 분들의 노고와 땀방울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좀 더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가야겠다.
(2015.6.15 동아닷컴 김유영 기자의 글을 읽고 느낀 소감)
정재원 명예회장은
―1917년: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
―1937년: 의과고시 합격
―1937∼1942년: 성모병원 소아과 의사
―1946∼1948년: 서울대병원 소아과 의사
―1960∼1965년: 영국 런던대 소아과대학원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 유학
―1965∼1986년: 정소아과 원장, 혜춘병원 원장
―1973년: 정식품 설립, 대표이사 회장 취임
―1984년∼: 재단법인 혜춘장학회 설립, 이사장 취임
―2000년∼: 정식품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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