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9월의 시
벌초에 관한 시 모음
+ 벌초
무딘 조선낫 들고
엄니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이재무·시인, 1958-)
+ 벌초
고개 숙인 벼 태풍으로 물에 잠기던 날
먼 산 보며 담배연기 날리던
텁수룩한 아버지가 여기 누워 있다
예초기에 잘려나가는 머리카락과 수염
어이 시원해!
여치를 따라 봉분 위로 달음박질하는
손자놈의 통통 튀는 웃음
남색 가을하늘 한 폭 끊어
새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면
초가을 볕 아래 하루가 참 맑다.
(전홍준·시인)
+ 벌초
내일 모레가 추석
아버지는 나무손잡이가 달린
구식 머릿기계로
아들의 머리를 깎으셨다
바람이 들어오는 헛청 그늘에서
왜정 때 썼다는 고물 기계로
밤송이 같던 아들의 머리를
팔월 박덩이 같이 깎아 놓으셨다
내일 모레가 추석
아버지 무덤에 가서 벌초를 한다
윙윙거리는 신형 예초기 칼날에
풀들이 바스라져 눕는다
달덩이 같은 무덤이 솟아올랐다
벌초가 끝나고
무덤가에 앉아 숨소리를 듣는다
하늘 어디쯤
아들의 머리를 깎고 계실
아버지의 낡은 기계소리를 듣는다
(정군수·교사 시인, 1950-)
+ 어떤 벌초
봉분의 잡초처럼 돋아난 머리
고운 손길처럼 어루만지고
세파에 찌든
하얀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져
발 밑에 쌓이는 세월의 흔적 더미
그 더미 속에
조용히 쪼그리고 있는
무언의 메아리
은유처럼 다가오는데
머리카락 계곡에
차곡차곡 입 벌리고 있는
곰삭은 인생유전
바라볼수록 지나온 마디가 저려오는 듯한데
(반기룡·시인)
+ 벌초
이 사람들아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나
전에는
낫질로 조용조용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이발을 하니
편안히 잠도 잘 왔는데
윙~윙~ 윙~
기계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편한 것도 좋지만
기계는 정말 싫어
옛날이 그리워....
(이문조·시인)
+ 벌초
청솔가지 숲 속에서
까치 부부가 통곡을 한다
세월을 망각한 죄인을
질책하려는 것인가
슬픈 한숨의 노래인가
목관 속에 영면하는
저승간 부모님의 안식처
시간과 더불어 삭아내려
저 울음으로 환생한 것인가
언제나 사립문 밖에서
새 소식 전해오던 저 소리가
한 줌 흙이 된 오매의 귓전에
생생히 울려오는 뜻 있어
잿상에 절하지 말고
어버이 살아 생전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지성으로 바쳐드리렴
내 무덤가 벌초 말고
내 마음속 원심을 뽑아
어둔 세상 속에 불을 지펴
양심의 불쏘시개 되렴.
(윤덕명·시인, 선문대학교 교수)
+ 벌초
큰물 몇 차례 지나간 뒤
누워있는 아버지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아버지가 억센 잡초에
포로가 되어 수풀 속에 갇히셨다
아버지가 함부로 돋아난 가시덩굴에
손발이 묶이셨다
불시에 아버지에게 뿌리를 내려
몸 갉아먹는 풀 베어버린다고
날 선 낫을 들었다
살 속 깊이 박혀 있어서
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튀어나온 뼈가 앙상하다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피 빨아먹고 기생한 세월들이
낫질 한 번에
수북하게 무덤으로 쌓였다
언젠가 아버지의 단단한 城을 무너뜨리려고
나의 가슴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이제 봉분 같은 아버지 가슴에
활활 불을 지른다
아직 푸릇푸릇 살아있는 목숨이
온몸을 뒤틀면서 한 소리 하고 있다
변신한 생이 짙고 매워서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길 막히기 전에 어서 떠나야 한다고
아버지의 남은 생을 마구 파헤쳤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벌초
처서를 사흘 앞두고
흐르는 땀에 목욕하며
벌초를 한다
뵙지도 못한 시아버지 묏등에 올라
잘하지도 못하는 낫질로
묵은 옷을 갈아입혀 드린다
지하에 계신 시아버지 적적하실까봐
언제부턴가 땅벌가족
뫼 옆에 집을 지어 호위한다
아들 며느리 큰손자 작은손자
비지땀을 흘리며 벌초하는데
어디선가 그분의 혼령인 듯
검은 나비 한 마리 날아와
대견한 듯 우리를 한동안 지켜보다
멀리 멀리 날아간다.
(홍경임·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 성묘 - 벌초
어느 것이 묘인지
어느 것이 길인지
정말 자랄 대로 끝까지 자라서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그래도 찾아야겠기에
예초기로 조금씩 조금씩
제거해 나가자
어느덧 눈물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끈끈한 액이
얼굴이며 전신을 적시며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조상의 분신 앞에서
위치 분별 않고 흐른다.
(전병철·시인)
+ 벌초하는 날
편안히 엎드린 양지쪽 봉분들
예초기의 잉잉 소리에 슬몃 고개를 든다
아래쪽에서부터 올라가며
헛기침 소리 요란한
둘째 큰아버지의 웃자란 머리칼을
곱게 다듬어드린다
지금도 다정하게 함께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언제나 대문까지 나와 손잡아주시던
두 분, 저 먼 둔덕 위에서
따사로운 햇살처럼 달려나와
풀 뽑는 내 손을 잡아주신다
"조상님들을 다 불러 놓았네"
당숙 아주머니의 말씀
9월의 하늘보다 말끔히
다듬어진 둔덕에서
봉분들이 어깨를 맞대고 해바라기하고 있다
(이솔·시인, 서울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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