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쉬어가는
자연 그대로가 아름다운 섬
대마도 여행
대마도
동경 125°59′, 북위 34°15′에 위치한다. 하조도(下鳥島)에서 서쪽으로 2.7㎞, 진도의 팽목항 선착장에서 18.5㎞ 지점에 있다. 면적은 2.57㎢이고, 해안선 길이는 14.5㎞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의 지형이 커다란 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 대마도라 불리게 되었으며, 약 1600년경 허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군마를 사육하던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질은 대부분 산성 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높이는 173m이며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가 대부분이다. 해안은 돌출한 갑(岬)과 깊숙한 만(灣)이 교대로 이어지고 있어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한 편이다. 파랑에 노출되는 남쪽 해안은 암석해안을 이루고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만입부(灣入部)에는 사빈해안(沙濱海岸)이 형성되어 있다.
1월 평균기온은 -0.6℃, 8월 평균기온 22.4℃, 연강수량은 1,019㎜이다. 비 또는 안개와 흐린 날이 210여 일로 많은 편이다.
2010년 기준으로 인구는 107명(남 42명, 여 65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대수는 71세대이다. 취락은 동북쪽 해안의 만안(灣岸)에 집중해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 0.08㎢, 밭 0.61㎢ 임야 0.99㎢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를 비롯하여 고구마·무·콩·고추·마늘 등이다.
주요 어획물은 톳·농어·멸치·도미·볼락 등이고 김·톳·바지락의 양식이 이루어진다. 진도의 팽목항 선착장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조도초등학교 대마분교장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마도[大馬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제국 왕인박사현창비
덕혜옹주봉축기념비
덕혜옹주[德惠翁主]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봉축기념비
[네이버 지식백과] 덕혜옹주[德惠翁主] (두산백과)
대한민국 전망대
통신사 이예공적비
원통사
조선통신사의 비석
이즈하라지부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수선사
이즈하라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수선사에는 항일운동 중 대마도에 유배돼 단식투쟁으로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수선사는 순국한 선생의 시신이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나흘간 머물렀던 곳으로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선생의
꼿꼿한 기개가 서려있다.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위정척사론을 실천한
최고령 의병장 면암 최익현선생
(1833-1906)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11월 3일과 14일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인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렸다. 거기서 그는 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그 체결에 참여한 박제순ㆍ이완용ㆍ이근택ㆍ이지용ㆍ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상소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계를 절감한 최익현은 투쟁의 방식을 바꿨다. 73세의 최고령 의병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06년 2월 그는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린 뒤 호남으로 내려가 자신의 제자이자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秉瓚, 1851~1916)과 함께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4백 명 정도의 최익현 의병은 정읍ㆍ순창ㆍ곡성 등을 돌며 시위했지만 병력과 무기 등 모든 측면에서의 열세로 인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최익현은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7월 8일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으로 저항했고 결국 11월 17일에 순국했다. 한국 근대사의 격동을 모두 겪은 73년의 길고 파란 많은 생애였다. 그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다리가 떨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참지 말고
가슴이 떨릴 때
더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자
그리하면
힐링이라는 값진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켜켜이 쌓인 내 절망의 찌꺼기는 어느새
다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희망에 벅차서
다시 일터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제
내 가족 내 이웃을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큰 열정으로 즐겁게 일을 하는
큰 가슴이 되어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가슴이 떨릴 때 여행을 떠나자!!
[사진제공]
장석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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