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희망
끝내 하지 못한 말은 ‘희생’이었다. 2011년 11월 재정 긴축을 위한 연금 개혁안을 발표하던 이탈리아의 엘사 포르네로 복지부 장관은 “국민에게 우리는…”이라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았던 마리오 몬티 당시 이탈리아 총리가 그가 못다한 말을 이었다. “희생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는 눈물을 쏟을 정도로 책임이 큰 사람이 아니다. 토리노 대학에서 교수였던 그는 연금 개혁이 전공이다. 재정 위기에 몰린 이탈리아에 거국 내각이 구성되면서 차출됐다. 그러니까 소방수였다. 불지른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그는 흐느꼈다.
오랫동안 이 장면이 가슴에 남은 건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선 장관이 울음을 터뜨리고서야 할 말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말해 왔다. 전쟁 통에 나라를 위해 땅과 집을 내준 사람은 십수 년이 지나 정부에서 징발보상증권이란 걸 받아야 했다. 금리가 연 20% 하던 시절에 연 5%짜리 이자를 주는 형편없는 보상이었다. 하지만 다 받아들였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 성의 표시라도 하는 게 고맙고, 그래서 욕심 낼 일이 아니라 여겼을 것이다. 나눌 것이 없던 시절 내 몫을 내어 전체가 사는 길을 택한 지혜이기도 했다. 그 희생이 모여 경제도 키우고, 집안도 세웠다. 개발 시대에도 그랬다. 소비자는 한국에서 비싸게 팔고, 해외에서 싸게 파는 기업을 응원했다. 외환위기 때 장롱 속 금붙이를 죄다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희생의 선순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네로의 눈물을 부른 이탈리아 수준의 연금개혁을 우리는 이미 수년 전에 했다. 흡족한 개혁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금 기금 고갈 시기를 40년 남겨놓고 연금을 덜 받는 쪽으로 개정한 연금법을 받아들인 국민은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다. 현 세대의 희생이 미래 세대에겐 희망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이런 희생과 희망의 선순환이 깨지고 있다. 희생 요구는 만성화됐는데 희망은 도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하라는 대로 했다간 당한다는 인식마저 커졌다. 이 바람에 아무리 위기를 말해도 모두 남의 일 보듯 한다. 홍성국 대우증권 부사장의 말처럼 ‘극장화’했다.
다음달 정부는 내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내년 경기가 단번에 좋아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기존의 관성대로라면 허리띠 졸라매기 식의 정책이 나올 법하다. 경제 혁신을 화두로 삼은 만큼 변화를 위한 구조 개혁 정책도 담길 것이다. 개혁은 희생을 담보로 한다.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면 혁신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머리를 싸매야 할 것은 개별 정책이 아니라 방향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 그리고 그 끝에 희망이 있다는 비전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시대다. 그 끝에 있는 희망이 설령 실낱같다 해도 희망은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다. 희망과 희생. 둘 다 '희'자로 시작하는 두 말은 연관성이 깊다. 노루꼬리 만한 희망이라도 희망이 있어야 그 희망의 끈을 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명언이다!! (출처: 2014.11.28 중앙일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의 글을 읽고 느낀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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