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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여행/제주도

제주도 감귤-201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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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진상품 제주감귤

 

 

 제주도 감귤-2014.11.3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진상품 제주감귤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감귤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1052(고려 문종 6)에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11세기부터 제주도에서 감귤을 진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감귤이 재배되었을 것이므로 제주 감귤의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중앙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수취 체제도 강화되었다. 수취 제도 중 진상 제도는 고려 초 이래로 행해졌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더욱 정비되었다. 제주도의 진상물 중 과실의 진헌을 위하여 1526(중종 21)이수동 제주목사는 5개의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였고, 이후 1530(중종 25)에는 과원이 30개소에 달하였다. 이는 기존에 파악되지 않았던 과원의 수에 이수동 제주목사의 과원 설치 이후 파악된 수이다.



17세기 중반에는 과원이 37개소에 이르며 각 과원의 위치 및 설명이 나타난다. 18세기 전반에는 과원이 42개소로 증가하고, 19세기 중반에는 54개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원의 증설은 중앙에서 요구하는 감귤의 진상 액수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감귤의 진상은 감귤의 익는 정도에 따라 9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이루어졌다. 9월에 제일 먼저 유자가 봉진되고 10월에 감자와 동정귤을 시작으로 늦게는 산귤이 봉진되었다. 『남환박물』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귤은 2월이 되어야 맛이 좋아 2월에 진상하였다. 감귤은 생과 외에 약재로도 중요하여 12월에 세초 진상이라 하여 진피·청피·귤핵 등이 꾸준히 바쳐졌다
.



18세기에 접어들어 감귤 진상 액수가 줄어들었다. 1801년 공노비의 해방으로 과직을 구하기 힘들어져 공과원(公果園)의 감귤 생산 액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과원(私果園)의 감귤 징수를 늘리게 되자, 부담이 가중된 농가에서 감귤 재배를 기피하게 되어 차차 감귤 생산이 줄어들고 진상 액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일부 감귤의 생산이 특히 저조하여 19세기 중반에는 특정 감귤류에 대해서 대봉(代奉)이 이루어졌다. 금귤을 대신하여 당금귤과 유감으로 봉진하였고, 등자귤 대신에 동정귤, 산귤 대신에 감자를 봉진하였다. 그러나 『제주계록』에는 대봉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동정귤 대신에 등자귤을, 유감 대신에 금귤을 진상하였고, 후에는 금귤과 등자귤의 생산도 많지 않아 모두 산귤로 대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귤이 진상되면 임금은 감귤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
黃柑製)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 과거 시험이 많아져 급제자가 증가하여 폐단이 생겼을 때, 다른 과거 시험들은 줄였으나 황감제만큼은 계속 시행했을 만큼 감귤 진상은 의미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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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주제와 목적도 있어야 한다.

주제가 없는 여행은 방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제와 목적이 있는 여행을 할 때

열린 마음으로 만나는 것들을 통해

비로소 여행의 기쁨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일종의 여행과 같다.

출발점이 있으면 종착점도 있다

인생도 여행도 가끔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지금 당신은 어떤 여행자의 모습으로

인생길을 걷고 있는가?

(호프만 지음,

행복은 돈이 되는 것일까?

p.189)

 

[ 사진과 글 ]

 

명품 사진작가

제주도 송춘익님